Here’s to the crazy o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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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탁은 어떻게 여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Aug 6th
삼국지에 나오는 영웅들 중에서 가장 멍청한 양반 중 한명으로 묘사되는 사람이 동탁입니다. 그런데 이 동탁이 여포라는 친구를 싸우다 만나서 다른 진영에 있는 이 친구를 스카웃 했습니다. 그리고 한 때나마 세상을 지배하지요.
길고 난다는 친구들도 동탁 + 여포 진영에는 감히 맞서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뭐.. 물론 그 유명한 초선의 활약으로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이들의 인연은 마무리 되지만, 만약 초선이 없었다면 이 두 친구들이 상당 기간 패권을 장악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궁금한 점은 동탁이라는 멍청한 친구가 어떻게 여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입니다.
여포는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비나 관우도 어떻게 못해보는 엄청난 사람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또, 소설에서 묘사되기는 의리가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으나, 사실 초선이 빛이 나는 건 그만큼 띄어내기 힘든 동탁과 여포를 띄어놨다는 점이니 그만큼 동탁에게는 나름 신의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뭐.. 여포가 조조나 유비, 손권의 아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탁 밑에 있어노니 결국 신의도 없고 명분도 없는 사람이 되었버리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를 동탁은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답은 이렇습니다. 앞에서 한번 이야기한 허영심과 야심중 에서 여포는 허영심이 강한 친구였던 만큼 허영심을 충분하게 채워 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친구에게 대의명분이니 무언가를 이루려는 뜻이니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죠. 뭐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큰 문제가 안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여포에게는 허영심 80%에 야심 20%를 채워 주는 사람보다는 허영심 90%를 채워주는 사람이 더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이죠.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이런 경우들은 너무 많이 이야기들 하니 예를 들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중요한건 상대방의 허영심과 야심의 크기에 맞추어 리더는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점 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리더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이 허영심이 강하면 상대방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야심이 강하면 상대방도 그렇다고 오해 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까운 사람들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어떤 일이든 이루기 위해서는 그 꿈이 크면 클수록 많은 사람이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허영심이 강한 사람과 야심이 강한 사람 모두 필요할 것입니다. 허영심이 강하다고 모두 필요 없는 사람은 아닐 것이며, 야심이 강하다고 꼭 필요한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허영심과 야심은 그 합의 크기와 균형이 중요하지 그 어느 하나가 절대 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많이들 고고한 리더쉽을 이야기 합니다. 비전과 명분, 사람에대한 관심.. 하지만 때로는 돈, 사람들의 시선, 입에 발린 칭찬 이런 좀 없어보이지만 힘이 있는 수단이 훌륭한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잊으면 안될 것 같습니다. 물론 반대도 성립하는건 너무 명확한 일이겠지요.
허영심과 야심
Jul 10th
시오노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 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허영심이란 남들이 좋게 생각해주는 것을 기뻐하는 심정이고, 야심은 남에게 좋게 여겨지지 않더라도 이루지 않으면 안되는 마음이다.
중략
허영심이란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심정이고 야심은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싶어하는 의자라고 생각한다. 남에게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권력이 필수불가결하지 않지만,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해내는 데 필요한 힘이나 권력이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허영심은 있지만 야심이 없는 사람은 욕심없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또한 욕심이 없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간주된다. 추대되는 것은 항상 이런 부류의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다.
출처: 로마인 이야기 4권
어제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일을 열심히 한다면 그건 허영심 때문일까요 야심 때문일까요?’
‘난 누군가가 인정을 해주지 않음에도 무언가를 이루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닐까?’
‘나의 야심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오늘 무박이일 가벼운 행군을 갑니다. 행군 중 생각해 볼만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
Jul 1st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라는 책에 이른 글이 있습니다.
You may give them your love but not your thoughts.
For they have their own thoughts.그대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나하면 그들은 그들의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You may house their bodies but not their souls,
For their souls dwell in the house of tomorrow, which you cannot visit, not even in your dreams.아이들에게 몸이 쉴 수 있는 집을 줄 수는 있느나, 영혼의 집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당신이 가본 적도 없고 꿈속에서도 갈 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You may strive to be like them, but seek not to make them like you.
For life goes not backward nor tarries with yesterday.아이들처럼 되려고 노력을 할 수는 있으나, 아이들을 당신처럼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뒤로가지 않으며, 어제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Kahlil Gibran from ‘Children from The Prophet’
그런데 우리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사랑이 아닌 나의 생각을 주려고 하고, 몸이 쉴 수 있는 집이 아닌 영혼을 가두는 관습을 주려고 하며, 상대방에서 배우려 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자신처럼 만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 뿐만 아니라 나아닌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특히 나보다 경험이 적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범하는 우인 듯 합니다.
정확한 답은 실증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인가?
Nov 28th
이 글은 Dobiho님의 ‘‘이코노믹 씽킹’에 나온 답은 진실일까?‘라는 글에 트랙백을 걸기위해서 작성된 글입니다.
Dobiho님은 ‘이코노믹 씽킹’과 ‘괴짜 경제학’을 비교하면서 ‘이코노믹 씽킹’에서 제시한 답들이 진짜 답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실증이 없는 답은 정답이 아니다.’는 결론을 내셨지요.
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Dobiho님의 결론에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이코노믹 씽킹’에서 사용된 논리와 추론에 근거가 되는 이론들은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검증에 검증을 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권위에 의한 ‘미신’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공리에 가까운 이론을 바탕으로한 추론은 그 추론 과정에 비약만 없다고 한다면 명백한 답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1) 바탕이 되는 이론이 잘못된, 충분하게 검증이 안된 것이라던지, (2)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논리를 전개해 나가서 비약이 있다면 완전히 엉뚱한 답을 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이야기는 경제학과 같이 많은 실증을 통해서 증명된 이론이 있는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 일상에서는 (업무와 관련된 많은 경우) 많은 실증을 통해 증명된 공리에 가까운 이론이 아님에도, “훌륭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더라” 또는 “내 경험에 의하면 이건 사실이다” 라고 결론지은 것을 공증된 이론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또, 공증된 이론이 있는 경우에도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나름의 해석으로 논리를 펼쳐나가서 큰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론에 대한 이해가 이야기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정확하지 않을 경우에는 잘못된 답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경우도 많지요. 이코노믹 씽킹에서 이야기하는 어쩌구리 가정법 예에서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공증된 이론이 있고, 이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에 따른 비약이 없는 논리 전개를 통한 결론이라면 그 답의 신뢰성은 어떤 실증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결론 보다 정답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실증적인 데이터가 있는 답과 비교해서 어떻게 더 정답에 가깝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느냐고 반문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면서 들었던 통계학 수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전수조사 보다 표본조사가 더 실제 값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했었지요. 말도 안되는 이야기 아닙니까? 전체를 다 조사 하는 것보다 몇개만 추려서 조사 하는 것이 더 실제 값에 가까울 수 있다는게 말이 됩니까?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수조사를 하면서 조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차가 표본 추출을 해서 조사 수를 줄여 조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차를 줄이면 표본 추출에 따른 오차를 상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공감 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꽤나 많은 오차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같은 논리로 저는 ‘공리를 기반으로 치밀한 논리에서 만들어 내는 결론이 데이터를 통한 실증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증적 데이터’라는 부분도 (1) 실증을 위한 조사를 하는 과정 (2) 데이터를 처리하는 과정, 그리고 (매우 치명적인) (3)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오차가 생각보다 무척 크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실증처럼 보이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더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점을 생각해 감안하면 그 오류는 정말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많은 검증을 거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공증에 가까운 이론을 기반으로 비약이 없는 논리에 따른 결론이 내재하고 있는 오차 와 실증이라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도출된 결과가 내재하고 있는 오차를 비교 한다면 후자가 더욱 크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지 않으셔야 하는 부분을 다시한번 말씀드리면, 저는 ‘이코노믹 씽킹’에서와 처럼 공증된 이론을 바탕으로한 비약없는 논리 전개에 따른 결론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지 공증된 이론도 아닌 ‘속설’을 기반으로한 논리 전개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비지니스에서는 상황이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미신’에 사로 잡혀 그것이 공증인냥 논리를 전개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입니다.
실제 비지니스에서는 내가 믿고 있는 ‘이 것’이 ‘미신’인지 ‘공리’인지를 끊임 없이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통한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객관적 해석을 겸해서 말이지요.) 같은 말로 데이터를 통한 검증은 ‘미신’과 ‘공리’를 구별하는데 쓰여야지 ‘미신’을 확신시키기 위해서 쓰여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덧, Dobiho님 지난 번 질문하셨던 두가지 공연 문제 대한 부분 설명은 아주 쉽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랑하자면 바로 정답 맞췄습니다. ㅋㅋ)
노부나가가 이야기 하는 人材論
Feb 7th
최근에 오픈마루스튜디오 블로그에 올라온 ‘삼고초려를 넘어서‘라는 글을 재미있게 봤습니다. 관련해서 얼마전 읽은 ‘오다 노부나가 경영 10법칙‘이라는 책의 내용이 생각이 나서 포스팅을 합니다.
사실 어느 기업이나 입으로는 훌륭한 인재를 모아야 한다 이야기를 하고 훌륭한 인재가 회사를 만든다 이야기를 하지만, 사실 주변의 많은 회사들이 훌륭한 인재를 모으는데 열정적이냐 하는 부분에서는 의문이 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새로 시작하는 기업들에서는 그 어느 곳 보다 한명 한명의 사람들이 중요하고 그 역할이 클텐데 인재들이 오길 꺼려 한다는 이유로 인재를 모으는 것을 포기 해 버리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오다 노부나가 경영 10법칙’이라는 책에서는 노부나가와 수강생의 대화로 꾸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수강생: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고민입니다. (중략) 인재 채용의 비겨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노부나가: 그렇다면 반대로 묻겠네. 그대의 회사에 우수한 인재가 모일 이유가 있는가?수강생: 무슨 말씀인지?
노부나가: 사람을 모을 만한 매력이 있느냐고 묻고 있는 걸세. (중략)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은 모두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하네. 직장을 다닌다는 건 소위 자신의 일생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니, 자기 인생을 맡길 만한 매력이 빠져서야 쓰나.
(중략)
수강생: 그렇다면 저희 같은 영세기업은 우수한 사람을 채용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십니까?
노부나가: 그렇지는 않아. 내가 맘에 안 드는 건 “저희는 이름도 없는 중소기업으로 아무 장점이 없습니다.”라는 그대의 소극적인 태도야. 무장이 자기 스스로를 비하해서 어쩌자는 게야! 설사 자신이 없더라도 자신이 있는 것처럼 구는 게 무장으로서의 도리다. (중략) 아직 아무것도 없는 인간은 장래를 향한 낭만을 뜨겁게 늘어놓은 길밖에 없어.
NHN 같은 누가 봐도 탄탄하고, 비젼있어 보이는 회사는 수백명 모집을 해도 수백대일의 지원자가 몰립니다. (얼마전에 경험해 보셨지요?) 물론 궁극적으로 NHN과 같은 회사 Google과 같은 회사를 만들어야 겠지만, 그런 회사가 되기까지는 아직은 불확실하고, 뭔가 인생을 던지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는 회사의 시절을 거쳐야 됩니다. NHN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Google도 그런 시절이 있었겠지요. 그 시절의 회사들은 누구나 좋은 사람을 채용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멋진 회사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겠지요. 위의 책의 노부나가가 이야기 하듯이 우선 ‘자기 인생을 맡길 만한 매력’을 만들어 내야 할 것이며, 그것도 부족하다 싶으면 ‘장래를 향한 낭만을 뜨겁게’ 늘어 놓는 일도 서슴치 않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전에 좋은 사람들이 느끼는 매력이 무엇인지 그들의 낭만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 봐겠지만 말입니다.
사실 이런 노력의 필요성은 작은 회사나 큰 회사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정조와 이건희
Nov 23rd
최근 저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이덕일著, 김영사)’를 읽고 있습니다. 2권으로 되어 있는데 한권은 다 읽고 2번째 책을 주문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정약용은 정조시대의 인물입니다. 영조시대 부터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았던 노론과 그들이 죽인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 정조는 노론의 지나친 힘을 균형으로 이끌고자 남인을 등용하기 시작합니다. 그 당쟁의 한가운데 남인이었던 정약용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이야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충분히 배워서 알고 있는 내용이고, 그다지 흥미로운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전 책을 읽으면서 줄 곧 갑갑한 마음이 들었던 대목이 있습니다. 똑똑한 남인들은 정조의 지지를 힘에 업고 이런 저런 맞는 이야기를 합니다. 상소의 형태든 일렬의 정책의 형태든 말입니다. 정조는 남인의 말에 귀를 기우리고, 훌륭한 정책과 논리인 경우 그들을 적극 지지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정조의 지지는 곧 노론의 타도 대상이 되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옳은 이야기를 하고, 옳은 정책을 펴고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노론의 힘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노론은 그를 제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제거를 하는 명분은 만들기 나름입니다.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힘있는 자들이 주장하면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바뀝니다. 예를 들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보면서, 너무 많은 이들이 사도세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라고 이야기하자, 내분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앞으로 사도세자 문제는 더이상 이야기 하지 말라’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 였겠지요. 그러나 그 한마디는 정조와 남인의 발목을 잡습니다. 정조시대에는 충분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밝히고 재평가 할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세자가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선왕 영조에 대한 불충이고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뿐만 아닙니다. 학문적으로는 서학, 종교적으로는 천주교를 발목잡기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모습은 정말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서양의 학문을 받아드리고 과학 기술 을 배우려고 했던 이들도 모두 이단으로 치부 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개혁적인 성향의 남인들은 서학에 관심이 있어 서학공부를 많이 하였고 또 그 덕분에 매우 실용적인 학문에 많은 발전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순수한 의도였을 지라도 공격할 수 있는 허점이 되었던 것이지요. 결국 똑똑한 남인들은 천주학과 천주교라는 멍에를 쓰고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를 당합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비슷한 사례들을 많이 보는 것 같습니다. 회사 내에서도 옳은 소리, 바른 소리를 하다가는 다른이들의 주적이 되고 맙니다. 그런 모습이 리더에게 까칠하게 느껴진다면, 리더로 부터 배척을 당할 것이고, 운 좋게 리더에게 인정을 받는 다고 한다고 하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지목 되지요. 그 옳은 소리, 바른 소리에는 어떻게 잘 지내보려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아주 가시가 들어있는 말들이 대부분일 테니까요.
삼성 이건희 회장이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발목잡기’를 지적했다고 합니다.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조직이든 조직 나름대로 좋은 사람을 적던 많던 둘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실력 발휘를 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느냐가 그 조직의 성패를 가름 짓겠지요.
사람 사는 모습은 영정조 시대나 지금이나 다름 없나봅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군요.
양심과 성공 -iCon 스티브 잡스를 읽고
Sep 18th
사실 성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성공을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성공’ 이라는 것으로 범위를 좁혀서 생각해보고 싶다. 크게는 큰 회사의 오너가 되는 기업에 임원이 되는 것 까지. 사회적으로 인정 받고 경제적인 부도 축적 할 수 있는 그런 성공 말이다.
최근에 읽은 ‘iCon 스티브잡스’라는 책을 보면 스티브 잡스의 파렴치한 행위들 인간적이지 못한 행동과 말들을 볼 수가 있다. 물론 스티브 잡스가 무척 괴짜이고 유별난 경우 일 수 있다. 결혼전 동거하던 여자 친구가 낳은 딸을 친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쫓아 냈으며, 창업을 할 때 같이 고생한 사람들에게 스탁옵션등의 어떤 경제적인 보답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100%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여지 없이 쫓아 내고 만다. 특히 자신의 Apple Come-Back을 도왔던 당시 CEO 길 어밀리오 마저 배신을하고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찾이한다. 그리고 어밀리오의 공적까지 온전히 자신이 다 차지 한다.
물론, 스티브 잡스 더 정확히 스티브 잡스의 APPLE, PIXAR가 시장에 선보인 제품들은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을 바꿀만큼 혁신적인 제품이 여럿 있었다. 그의 아이디어가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 그의 공이 얼마나 있었는지를 논외로 하고, 그의 회사에서 그런 제품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런 제품을 개발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 스티브 잡스가 받고있는 상과 공의 상당부분은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것을 가로챘다는 것도 사실 인 듯 하다.
그렇다면, 과연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철저한 자신이 공(功)을 차지하는, 그리고 그렇게 차지한 공(功)으로 인정 받는 이런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스티브 잡스가 되었을까? 아니면, 스티브 잡스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을까?
성공한 사람들 중에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을 우리는 언론을 통해서 많이 듣는다. 그런데 이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아주 특이한 인격적인 사람들을 언론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소개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슬프지만 어쩌면 이 시대의 ‘성공’ 이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양심’ 쯤은 쉽게 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모두가 그런건 아니겠지만.. 확률적으로 많은 부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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