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관객

Filed Under (Diary, JOON) by jmirror on 04-07-2006 | 56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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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에나 ‘순수관객’은 있습니다.

순수관객에 대해서 뒤아멜(wikipedia)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결코 투우장에 직접 내려가지 않을 것. 지성을 갈고닦고 무슨 일에도 동요하지 않고 오로지 보고 듣고 재고 평가하고 추론하는 것으로 일관할 것. 그것이 차고 오만하고 귀족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일관할 것. 투기장에서 관객으로 일관하다 보면 때로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구경만 하는 것보다 직접 몸을 던져 정열을 붙태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그것으로 일관할 것…”

늘 순수관객은 욕을 가장 많이 먹는 것 같습니다. 어느 한편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정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순수관객을 욕합니다. 똑똑하고 먹물 꽤나 들었다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는)정의를 실천 하지 않으니, 이거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때로는 상대방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몰아 세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아래 글에 올렸던 ‘뇌를 단련하다’에서는 순수관객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를 소개 합니다. 그의 저서를 통해서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겼고, 루터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할때 유일하게 번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성서라며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성서를 번역하였으나, 에라스무스는 순수관객이었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카톨릭의 부패와 부조리를 실날하게 지적하였지만, 폭력적인, 지주의 편에서서 농민을 죽이는 것이 신의 뜻이며, 개인은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여러번의 권유에도 카톨릭의 편에 선것도 아니어서, 그의 저서는 모두 카톨릭 금서가 되었습니다. 그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에라스무스를 비판 하였고, 그가 죽은뒤에도 에라스무스의 가치를 알아내는데에는 수백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 관류하는 특징은 자유지식인으로서의 독자성과 비판적 이성의 견지이며 바로 이러한 사상과 방법을 통하여 그가 추구했던 궁극의 목표는 신ㆍ구 기독교의 화해와 그것을 통한 세계의 평화였다.

-최상용(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모두가 입모아 우리나라 정치적 스승이라고 부르는 김구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해방직후 좌우 대립 가운데 그는 어느쪽에도 서지 않으셨습니다. 이승만을 비롯한 우파 진영이나, 박헌영, 김일성을 비롯한 좌파 진영에서 얼마나 그가 미웠을 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맞다고 확신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편을 들지 않은 김구 선생님이 정말 눈엣가시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김구선생님도 순수관객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순수관객을 욕하지만, 그 이유는 순수관객이 참여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편이 아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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